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 (문단 편집) == 과정 == 1923년부터 양국의 합의에 따라서 튀르키예 정부는 "그리스인", 그리스 정부는 "튀르크인"에게 자국을 떠날 것을 명령했는데 그 결과 많은 "그리스인"들이 튀르키예를 떠났고 마찬가지로 "튀르크인"들은 그리스를 떠났다. 도시에서는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가 서로 섞여 살고 있었지만 농촌에서는 각 종교 신자들이 마을 단위로 모여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많은 마을들이 버려져 폐허가 되었다. 사실 발칸 전쟁에서 패한 직후부터 오스만 영내의 기독교 신자들에 대한 많은 탄압과 학살이 있었기 때문에 이미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오스만 영토를 떠나 다른 나라로 이주하고 있던 상태였다. 각 난민들이 남겨두고 떠난 재산은 모두 몰수되어 각 정부의 재산이 되었고 이 점에 있어서는 부유한 그리스계 인구가 남겨둔 재산을 거저 얻은 튀르키예 정부가 훨씬 더 이익을 얻었다. 이스탄불 등의 도시지역의 일부 그리스인들은 추방명령에서 면제되어[* 이스탄불은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함락된 이후에도 상당기간동안 정교회인구가 무슬림인구보다 많았다. 1차대전 직전인 20세기 초만해도 이스탄불의 정교회 인구(즉 그리스인)는 30만명에 달했는데, 이는 이스탄불 전체 인구의 1/3이나 되었다.] 원하면 튀르키예에 계속 남을 수 있었으나 이들 역시 튀르키예 당국의 지속적인 박해와 1955년 이스탄불 포그롬(박해) 이후에는 거의 그리스로 이주했다.[* 역대 튀르키예 정부는 그리스인 박해에 대해 나몰라라 했으나 의외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이 2006년 총리 재임 당시에 이에 대해 사과했다.] 이런 인구교환 후에 갈등요소가 해소된 탓인지 인구 교환 직후부터 적어도 정부 차원의 [[그리스-튀르키예 관계]]는 일정 부분 해소되었다. 튀르키예 공화국은 자국내 그리스인들에게 여러 차별정책을 폈지만[* 그리스인들은 튀르키예에서 공무원직이나 의사나 변호사같은 전문직은 가질 수 없었다.] 정작 그리스와는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그리스-튀르키예 전쟁]]의 주역이자, 이 교환을 주도한 [[케말 아타튀르크]]는 아나톨리아에서 그리스군을 몰아내는데 일등공신이었지만, 전쟁 후에는 항상 그리스-튀르키예 관계의 중요성 및 양 민족의 우애를 강조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